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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작가 김중만 부인 오수미의 드라마 같은 비참한 삶! 불륜, 교통 사고, 동생 윤영실 실종..

요즘 그 존재가 다시 환기된 여배우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그녀의 이름은 오수미 인데요. 한편 42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한국영화사에서 만나기 힘든 ‘포스’를 지닌 여인이었다고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활동 시기가 한국영화의 암흑기였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이었다는 사실인데요.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시기였기에, 그녀의 존재감은 더욱 강렬했을지도 모릅니다. 오수미(본명 윤영희)는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오디션에 의해 배우가 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연출가였던 신상옥 감독의 작품을 통해 스타덤에 오를수 있었는데요. 

 

 

당대 최고의 배우로 활약하던 자매가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됐다. 배우 오수미‧윤영실 자매가 그들이다.

 

그러나 1985년 5월 윤영실이 실종되면서 자매의 비극이 시작된다.

윤영실은 언니 오수미가 사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근처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오수미는 어느 날부터 동생과 연락이 뚝 끊겼다. 불길한 예감이 들자 윤영실의 거주지를 직접 찾아갔고,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집 안에서 인기척이 없었다.

오씨는 건물 경비실로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열쇠기술자를 불렀다. 그런 다음 경비원을 대동하고 현관문을 강제로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사람은 없었지만 살림살이도 그대로 있었다. 평소 때와 다름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누군가 침입했다면 살림살이가 어지럽혀 있고, 몸싸움한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집 안은 너무도 깨끗했다. 현관문 열쇠가 안에서 잠겨있었고, 누군가 강제로 문을 딴 흔적도 없었다.

 

그녀가 말없이 스스로 사라질 이유는 없었다.

윤영실은 모델, 배우, 광고 등을 넘나들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동료 모델과 회사까지 설립해 후배 양성에 열정을 쏟던 참이었다. 한참 잘 나가던 윤영실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스스로 잠적했을 리가 만무했다.

 

한때 ‘자살설’이 제기됐으나 사전 징후나 유서로 추정할만한 것도 없었다. 윤영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언니 오수미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지만 여기까지였다. 그렇게 윤영실은 실종 아니 '증발'됐다.

 

결국 윤영실 실종은 미궁으로 빠지며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그녀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살아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확인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때문에 지금까지 연예계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유명 연예인이 이렇게 완벽하게 사라진 것에 대해 ‘권력 희생양설’도 끊이지 않았다.     

동생이 실종되면서 오수미의 삶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결국 1987년 영화 '토요일은 밤이 없다'를 끝으로 17년 동안의 연예계에서 은퇴한다.

 

 

오씨의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은 신상옥 감독과의 스캔들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1973년 신 감독의 영화 ‘이별’에 출연하면서 그와 사랑에 빠진다. 당시 오수미의 나이는 23세였고, 신 감독은 그보다 24세가 더 많았다.

 

영화감독 신상옥 최은희 오수미 삼각관계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 결국 사랑에 이기는 사람과 사랑에 지게 되는 사람들이 남게 되죠.

 

오씨는 이국적인 외모와 우수 짙은 큰 눈동자, 섹스어필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끌면서 순식간에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영화배우 최은희의 남편이었던 신 감독은 오수미와의 스캔들로 이혼하게 된다. 오수미는 신 감독과 사실혼 관계로 살며 1남 1녀를 낳았다. 배우 신승리(43)가 신상옥 감독과 오수미 사이에서 난 딸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난다. 최은희는 여배우로 활동을 하다가 1978년 1월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하여 납북이 되엇고, 신상옥은 전처 최은희를 찾다가 동년 7월달에 홍콩에서 납북이 됩니다.

 

(참고로 이 때 신상옥은 아내를 찾기 위하여, 거의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들어가게 됨)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신상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을 홀로 키우다가, 당시 사진작가로 굉장히 유명했던 김중만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신상옥 감독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하면서(북한을 속이기 위해서), 당시 남한에서는 신상옥에 대한 여론이 굉장히 좋지 않았고, 오수미와 김중만 역시 정부 기관의 사찰을 당하게 됨)

결국 신상옥의 북한행이 의도치 않게 오수미와 이혼한 계기로 작용하게 된 거죠.

그런데 신상옥과 최은희가 1986년 기적적으로 탈출하게 되자, 오수미의 입장이 난처해지게 됩니다. 비록 법률상으로는 전남편이지만, 그래도 오수미가 사랑하는 남자였으니까요.

...

납북된 지 8년 만이다. 신 감독이 돌아오자 오수미는 키우던 두 아이를 그에게 보내 호적에 입적시켰다.

공교롭게도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탈출에 성공한 지 2개월 후 오수미 동생 윤영실이 행방불명된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오수미가 김중만과 이혼했다. 두 사람의 파경은 ‘성격차이’로 알려졌지만, 당시 오수미는 여러 심경이 교차됐을 것으로 보인다.

 

신상옥이 북한에서 최은희와 재결합하고 자신은 그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여기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탈출하면서 언론의 집중관심을 받았는데,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이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탈출한 후 김중만은 미국으로 추방된다.

 

그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한 것을 보면 "(1986년 새벽에) 안기부에서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는 북한에서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탈출했다고 하더라. 그 소식을 듣고 참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안기부) 사람들이 또 ‘가시죠’ 그러는 거다. 새벽에 다시 공항에 갔고, 이번의 첫 비행기는 미국행이었다. 지금도 왜 그 사람들이 나를 추방시켰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했다.

 

신상옥‧최은희가 탈출했는데, 왜 김중만이 미국으로 추방된 것일까.

 

김중만과 이혼한 오수미는 영화배우로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명성에 걸맞지 않는 B급의 에로영화 밖에 섭외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1987년 영화 ‘토요일은 밤이 없다’를 끝으로 17년 동안의 연예계에서 은퇴한다. 사실상 퇴출하다시피 연예계를 떠났다.

 

 3년 뒤인 1990년 4월27일 오수미는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다.

1987년 3월에 대마초를 상습적으로 피운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는데, 당시 검사가 검찰총장을 지낸 채동욱 변호사다. 이후 오수미는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 홀로 생활했다.

 

 

오수미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2년 6월30일 미국 하와이 빅 아일랜드로 여행을 갔다가 변을 당했다. 친구부부와 마우이산을 돌아본 뒤 밴 승합차로 도로를 달리다 브레이크가 파열되면서 차가 낭떠러지로 굴렀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오수미 사망 이전에 우울증을 앓았다는 소리가 있는데, 아마 운명은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수미 역시 절망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당시 그녀의 나이 42세였다. 이로써 오수미는 비극적인 삶의 주인공이 됐다. 오수미는 고향 제주에서 영면에 들었다.

 

어느 한사람의 인생을 위의 몇줄로 나열하는것은 웃긴일이겠지만, 정말 인생자체가 비운이었던 여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는데요. 특히 그녀가 30대에 접어들며 찍은 1980년대 영화들엔 ‘삶의 피곤함’ 같은 것이 배어 나오는듯 합니다. 당시 충무로 여배우의 대세였던 ‘글래머’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는, 퇴폐적인 팜므 파탈이었으며 강렬한 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이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이국적이면서도 강렬하고, 슬픈 것 같으면서도 감정을 터트릴 땐 활화산 같았던 여배우 오수미. 하지만 당시 한국영화는 그녀의 그 독특한 느낌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길을 모색했지만, 그녀는 삶과 운명의 굴레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다가 30대 중반에 은퇴의 길을 선택했고 결국 요절하고 말았습니다.